top of page

59. 마태복음 11장 1-15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작성자 사진: newvanjireh
    newvanjireh
  • 2018년 12월 10일
  • 12분 분량

59. 마태복음 11장 1-15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고 말았다는 사건입니다. 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2절에 기록된 것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는 겁니다.

오시기로 약속된 그 메시야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다시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6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다는 거죠.

그래서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 이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례요한조차 실족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그렇기에 천국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결론입니다. 12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세례요한의 실족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먼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이 세례요한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이유. 9절.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광야에 가서 그저 세례요한의 말씀만 듣고 돌아왔다면, 그 사람이 광야에 나간 것은 완전히 헛일입니다. 광야로 나간 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요?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거든요.

최초의 교회가 광야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갔을때, 그 광야생활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7장 37절을 보시죠.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그러니까. 모세와 함께 했던, 광야의 기간을 교회라고 하는거죠. 광야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다는 말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였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모인 이유가 뭐라구요? 오늘 본문에서는 9절에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다는 거죠

그러면 오늘 우리는 교회에 왜 나오셨나요? 저를 보려고 오셨습니까? 아니죠.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말씀 들으려고 오셨죠? 무슨 말씀들으려고 오셨습니까? 생명의 말씀 들으려고 오셨죠?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초대 광야교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성경은 광야를 교회라고 할까요?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양식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왜 교회라고 하나요?

광야를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광야는 먹을 양식이 없는데. 하늘에서 생명의 양식 만나가 내리기에. 그래서 광야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 만나를 먹는 곳이기에 그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떡, 만나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요한복음 6장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러니 광야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살을 먹는 곳이기에 광야를 교회라고 하는 거죠. 또 광야는 마실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석에서 생명의 물이 소아 나옵니다. 그러면 이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물은 누구를 상징하나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는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신령한 음료, 곧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곳이기에 광야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내가 삽니다. 나를 살리시는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 위해서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교회에 왜 오셨나요? 저보러 오셨습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요. 나와 너를 구원하신, 그 예수님 만나러. 그 예수님의 이야기 들으러,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고 교회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이 강단에서 그 예수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으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누구 만나러 오셨나요? 예수님을 만나십시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는데. 광야에 나가면 누구를 만나야 하나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선지자를 만나러 가면 안됩니다. 선지자의 말을 잘 듣고 돌아오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광야에 왜 나갔니? 너희는 선지자를 만나러 나갔지?

그런데 그 선지자, 세례요한은 10절.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낸 사자이다. 쉽게. 이 선지자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 광야에서 누굴 만나야 하니? 그 선지자가 증거하고 있는 메시야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니니? 이 이야깁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이 말씀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누굴 만났다는 뜻인가요?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이죠. 메시야를 만났기에,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야를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광야에서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다. 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 곧 메시야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세례요한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증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확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자.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러니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을, 3가지로 확인을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주셨죠.

둘째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하늘이 열리고 울리는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3가지를 통해서 확인했다는 말은, 3은 완전한 수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완전하게 보았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하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무슨 뜻인가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면, 천국에 가서도 세례요한이 제일 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천국에 가면 세례요한이 가장 작답니다. 무슨 뜻인가요?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보다 더 크다. 세례요한의 사역이나, 인품이나 그가 행한 일이 구약의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 더 위대하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은 누구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누구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구요?’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구요? 예수 그리스도.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전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율법과 글을 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나요? 못보았나요? 못보았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해서,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쭉 기록됩니다. 그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쭉 하면서, 39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만 받았지, 그 메시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시기로 약속된 그 메시야의 영이 임하여, 메시야를 증거했지만. 그 메시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은, 누구를 보았나요? 메시야를 보았죠. 그것도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 없을 만큼의 증거를 통해서,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그는 약속된 메시야를 보았거든요. 그런데 천국에서는 왜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되나요?

그 이유는 세례요한은 십자가를 보질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구원을 보질 못했죠.

그러나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십자가의 완성을 압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만 가는 곳이기에, 천국의 성도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 십자가를 압니다.

그래서 지금 세례요한은 구원자이신 메시야는 보았지만, 이 메시야가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그 귀한 십자가는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예수님의 구원을 보질 못했고,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이제 거기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천국에 있는 자들은 뭘 아나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압니다. 완성된 구원을 알기에. 천국에 있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크냐 작냐? 이 의미는, 천국에 무슨 차별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고 하시는 비유입니다.

왜 세례요한이 크냐? 그는 메시야를 보았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왜 작냐? 십자가를 보질 못했다. 이런 의미이지. 천국에 무슨 차별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세례요한을 소개했습니다. 쉽게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보았고, 메시야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확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성령의 역사를 보았고, 하늘에서의 음성을 들음으로, 너무나 분명하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 2절로 가시죠. 이 세례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 메시야가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왜 실족했을까요? 왜 갑자기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인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2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들어보니 아니 메시야 맞아? 하고 의심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의인은 구원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4절과 5절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라 이거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꺠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자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 서에 기록된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못듣는자가 듣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런데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석했냐면,

맹인, 걷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을 로마에 식민지가 되어 버린 우리 이스라엘을 빗대어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인들인데. 이런 우리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니까. 우리가 바로 맹인이요, 걷지 못하는 사람이요. 못 듣는 사람이요, 나병환자요, 죽은 자요, 가난한 자다. 이렇게 해석을 한 거죠.

그러니 메시야가 오면, 우리의 같은 의인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우리는 구원을 받고, 우리를 압제하는 저 악인들, 이방나라와 죄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메시야 사상을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는 세례요한도 예외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았죠. 이제 의인은 구원을 받고 죄인은 심판을 받는, 새로운 나라가 이뤄질 겁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눈에 이제 뵈는 것이 없습니다. 메시야를 보았거든요. 두려울 것이 없는 거죠. 나 같은 의인은 구원을 받고, 저 악인들은 심판을 받을 거니까.

그래서 이 세례요한이 당시 유대땅을 통치하던 헤롯대왕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헤롯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했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헤롯 왕에게 가서, 이 악한 사람아. 회개해라. 그랬더니 헤롯 왕이 가만 둘 수가 없죠. 화가 나서 세례요한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조금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왜요? 메시야가 오셨거든요. 메시야가 이제 저 악한 헤롯왕 심판하고, 감옥에 있는 나를 구원할 줄 것이요, 뿐만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서 이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거거든요.

그런데. 감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가 잠잠합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통해 메시야가 하시는 일들을 들어보니,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우리가 맹인이요 저는 자요, 듣지 못하는 자요, 보지 못하는 자요 가난한 자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 알았는데. 보니까.

예수님은 진짜 맹인의 눈을 고치고 있고, 진짜 저는 자를 걷게 하시고, 진짜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진짜로 죽은 자를 살리고 있더란 말이죠.

의인을 구원하시고 죄인들은 심판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죄인들을 치료하고 있더라. 당시 유대인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태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9장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을 보고는 예수님께 묻는 겁니다. 이 사람은 누구의 죄로 맹인으로 태어났나요? 이 사람의 죄로 인해 맹인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로 인해 맹인이 되었습니까? 이게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맹인, 저는 자, 못 듣는 자, 말 못하는 자는 전부 죄인들입니다. 그러면 메시야가 오시면, 저 죄인들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례요한이 보니까. 나같은 의인이 지금 감옥에 있는데 예수님 나는 찾아오지 않으시고, 저 죄인들의 질병을 고쳐 주고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고 만거죠.

심지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니까. 나는 평안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가정에 불화를 주러 왔다 이러니까. 세상에 세례요한이 에수님께 사람을 보내 묻는 겁니다. 오실 그 메시야가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고쳐 주시면서, 누가 진짜 맹인이냐? 본다고 하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진짜 맹인이다.

듣지 못하는 자를 고쳐 주시면서, 누가 진짜 듣지 못하는 자인가? 듣는다고 하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진짜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누가 진짜 가난한 자인가?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 진짜 가난한 자이다. 당시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성전에 나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장애가 생겼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맹인들, 저는 자들, 듣지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 나병환자들을 통칭해서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이고, 이 가난한 자는, 성전에서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앞에 예배 드릴수가 없는 자, 경제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자들, 성전에 나갈수 없었던,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러 나갈수 없었던 이 가난한 자들, 맹인과 저는 자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니 이 가난한 자들은, 우리는 정말 하나님앞에 나갈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앞에 우리같은 자들이 감히 예배드릴수 있게 되었다고. 얼마나 감동적일까요? 그러니 가난한 자들만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가난한 자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이 복입니다. 이 가난이란 경제적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앞에 나갈수 없는 장애를 가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내가 바로 맹인이요 저는 자요 듣지 못하는 자임을 깨닫는 것. 이게 가난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들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맞이하게 되기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내가 가난한 자임을 깨닫는 것이 은혜요 복입니다.

반대로 가난하지 않은 자들, 가난하지 않은 자들은 부자죠. 부자란 경제적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에 있어서 부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들이 부자.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부자요, 서기관들이 부자죠. 이 부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메시야는 의인을 구원하셔야 하는데, 로마제국에서 우리를 독립시켜 주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요? 세례요한은 의인이거든요. 부자거든요. 헤롯왕의 악함을 지적하고, 온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한 의인이거든요. 의인에겐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례요한은 실족했습니다. 에수님은 내가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거든요. 오직 가난한 자만 실족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나에게 복이거든요. 나는 예배드릴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예배하는 존재가 되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감히 하나님앞에 설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복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가 되십시요.

경제적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서 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이 세례요한이 실족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굳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고, 동시에.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자이니까.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구약에서 여자가 낳은 모든 인류의 대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모든 인류의 대표가 세례요한인데. 이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에서 실족하고 말았다는 말은, 예수님앞에서 실족안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세례요한만큼 확실하게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 세례요한조차 실족하고 말았다는 의미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앞에 실족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족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겠죠. 우리 말로 실족이란, 발을 헛디디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다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내가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뜻이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실족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실족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입니다. 이건 성경책을 직접 찾아 보시는게 좋은데, 성경책이 없으신 분은 기록해 두었다가 집에서 성경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요.

31절.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여기 버리리라, 앞에 숫자가 2라고 쓰여져 있죠. 성경 하단 각주 부분을 보시면, 2라고해서, 버리리라의 원 의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

33절도 보시죠.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서도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이 단어 앞에 3이라고 쓰여 있고, 밑에서 보시면, 헬. 헬라어의 원 의미는, 실족할지라도,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실족할지라도,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에는 4라고 쓰여 있고, 성경 하단에 보시면, 역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나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실족하다 라는 의미는, 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감옥에서 세례요한이 실족하고 말았다는 의미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어? 저런게 메시야라면, 나는 저런 메시야 필요 없어. 저건 내가 기대한 메시야가 아니야. 하고 예수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절대로 실족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할떄, 이거 베드로의 진심인가요? 아니면 거짓인가요? 베드로의 진심이죠.

그러나 그날밤 베드로 어떻게 했나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지 않은 제자들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다른말로 실족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을까요?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 라고 장담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절대로 예수님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정말로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겠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그냥 내 모습을 보십시요. 어제 토요일 예수님과 온종일 함께 하셨습니까? 어제 하루, 내 삶에 예수님이 계시던가요?

언제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까? 식사할때, 식기도하면서, 잠시 잠깐 3번, 성경보면서 또 한번, 급한 일로 기도하면서, 또 한번, 그 잠시 잠깐을 제외하고 언제 예수님이 내 삶에 계시던가요?

지난 주에 제 아들이 목욕을 하고 나오더니. 아빠. 나는 죄인임에 틀림없나봐, 그래서 제가 왜?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분명히 목욕하러 들어갈때. 예수님 생각을 해야지 하고 들어갔는데. 어느새 게임 생각만 하고 있더라. 그래서 제가 아빠도 그래.

우리는 늘 예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죄 지을때, 예수님을 버리죠. 마음에 분노가 올라올 때, 예수님을 버리죠. 내 이익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죠.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안버리고 단 하루라도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24시간, 예수님 생각하는 시간보다.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 세례요한도 실족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족했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실족했습니다. 다른 말로,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버렸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정상입니다.

사람들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은 늘 실족하기에. 늘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버리기에,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복음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거죠. 베드로가 실족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하며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보시죠. 그렇게 실족한 베드로, 고향으로 돌아가 물고기 잡을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묻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전과 같았다면, 베드로가 예. 제가 주를 사랑합니다. 외쳤을텐데. 이제 베드로가 알죠. 실족을 통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감을 통해서 베드로가 압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 의미는, 에수님 제가 에수님을 사랑한다고 백날 말해도, 제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사랑은, 나 중심적 사랑입니다.

저는 작은 문제만 생겨도, 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그래 이제 되었다. 가서 내 양을 쳐라. 그러면 이제 베드로가 실족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러겠습니까?

예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 이러겠습니까? 아니죠. 베드로 실족한 사람들에게 가서, 여러분. 저도 에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여전히 예수님을 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늘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는 주를 버리는데. 늘 실족하는데. 주는 늘 나를 찾아오십니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이게 천국이 침노한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 감옥에서 나는 저런 메시야 필요 없어, 하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버렸는데. 그런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심. 이것이 그 세례요한 안으로 천국이 쳐들어가는 이야기.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도 베드로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죠.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 본문 12절의 천국이 침노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쳐들어오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우리 말로 읽기에는 우리가 마치 천국을 빼앗아야 한다, 천국은 쟁취하는 것이다. 라는 씩으로 들리지만, 사실 이 말씀은 문법이 중간태라고 해서, 중간태는 주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주어가 없는게 아니죠. 예수님이 주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어로 놓고 보시면, 천국은 침노를 당합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에게. 세례요한 이후로는 예수님으로 인해 천국이 침노를 당하기에. 침노하는 자,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빼앗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뺴앗나요?,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뺏앗아서, 천국에 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침투해 들어갈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때, 이 에덴동산이 천국의 상징인데.

이 에덴 동산에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가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 천사들은 24시간 자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데, 대체 어느 누가 이 천사들을 무찌르고 천국에 침투해 들어간단 말입니까?

우리가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에수님께 잡혀 천국안으로 들어가는 것, 달리 표현하면 천국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쳐들어 오시는 것.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던, 그 세례요한 조차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땅의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다 실족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한들, 예수님을 버리고 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늘 실족하며 사는데. 나는 늘 예수님 버리고 사는데. 나는 늘 내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예수님은 늘 나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천국 아닙니까? 그래서 천국이 늘 나를 침노해 들어옵니다. 천국이 내 안으로 쳐들어오는 거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늘 예수님을 버리고 사는데.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가난한 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내 안으로 쳐들어오심.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를 사랑한다는 이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오늘도 말씀으로, 이렇게 저에게 쳐들어오셨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축원합니다.


Comments


A. 2196 44Ave, Vancouver, Bc V5P 1N2

T. 778-878-5238 

E. newvanjireh@gmail.com

 

Copyrightⓒ Vancouver Jireh  Church.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